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미뤄 두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돌아가신 아버지 앞으로 대출과 보증 채무가 남아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때 누군가 상속포기를 하면 된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한정승인을 해야 한다고 한다. 두 이름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효력은 전혀 다르다. 포기는 상속인 자격 자체를 버려 빚을 다음 순위로 넘기는 것이고, 한정승인은 상속인으로 남되 물려받은 재산 한도에서만 빚을 갚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오래된 상식 하나가 얽혀 있다. 자녀들만 포기하면 빚이 손자녀에게 간다는 말이다. 202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으로 이 지점이 정리됐다. 자녀 전부가 포기하면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된다. 이 글은 두 제도의 효력 차이에서 출발해 빚이 옮겨 가는 순위의 구조, 대법원의 결정, 3개월의 시계와 특별한정승인, 재산에 손대는 순간 생기는 함정, 그리고 어떤 경우에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두 제도의 효력 - 자격을 버리느냐, 한도를 긋느냐
민법 제1042조(포기의 소급효) 상속의 포기는 상속개시된 때에 소급하여 그 효력이 있다. 제1028조(한정승인의 효과) 상속인은 상속으로 인하여 취득할 재산의 한도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할 수 있다.
상속포기는 상속이 개시된 때로 소급하여 효력이 생긴다.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이 되므로 재산도 빚도 받지 않는다. 포기한 사람의 몫은 다른 상속인에게 그 상속분의 비율로 돌아가고(제1043조), 같은 순위의 상속인이 전부 포기하면 상속은 다음 순위로 넘어간다. 내 문제는 깨끗이 끝나지만 빚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옮긴다는 것이 포기의 본질이다.
한정승인은 상속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다. 다만 상속으로 취득할 재산의 한도에서만 피상속인의 채무를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상속재산으로 갚고 남는 빚은 갚지 않아도 되고, 원래 내 재산인 고유재산은 지켜진다. 대신 절차가 따른다. 상속재산 목록을 붙여 가정법원에 신고하고, 채권자에게 공고와 최고를 한 뒤 상속재산으로 배당 변제하는 청산을 거쳐야 한다. 채권자가 소송을 걸어오면 판결에 상속재산 범위 안에서만 집행할 수 있다는 유보가 붙는 대신, 상속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은 감수해야 한다.
빚은 어디로 가는가 - 순위의 사다리
법정 상속순위는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직계존속, 형제자매, 4촌 이내 방계혈족의 순이고, 배우자는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과 같은 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며 그들이 없으면 단독상속인이 된다(민법 제1000조, 제1003조). 같은 순위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촌수가 가까운 사람이 앞선다. 자녀가 있으면 손자녀는 상속인이 아니고, 자녀가 전부 포기하면 그때 비로소 손자녀나 직계존속에게 차례가 온다.
빚만 남은 상속에서 이 사다리가 문제였다. 자녀들이 포기하면 손자녀와 부모가, 그들이 포기하면 형제자매가, 다시 4촌까지 차례로 포기 신고를 해야 빚의 이동이 멈췄다. 미성년 손자녀의 포기까지 챙겨야 했고,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 사람이 빚을 떠안았다.
대법원 2020그42 - 자녀 전부가 포기하면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다
종래 대법원은 배우자와 자녀들 중 자녀 전부가 포기하면 배우자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이 공동상속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배우자가 한정승인을 하고 자녀들이 포기해도 손자녀와 부모가 다시 포기 절차를 밟아야 했다.
대법원 2023. 3. 23. 자 2020그42 전원합의체 결정은 이 결론을 바꿨다. 상속을 포기한 사람의 상속분이 귀속되는 민법 제1043조의 다른 상속인에는 배우자도 포함되므로, 배우자와 자녀들 중 자녀 전부가 포기하면 그 상속분은 남아 있는 배우자에게 귀속되어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빚만 남은 상속에서 자녀들이 포기하는 것은 자신은 물론 자기 자녀에게도 채무가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지 손자녀에게 빚을 넘기려는 뜻일 수 없고, 손자녀와 직계존속에게 별도의 포기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은 무용한 절차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게 할 뿐이라고 했다.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이제 자녀 전부의 포기는 손자녀에게 빚을 보내지 않는다.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이 결정은 배우자가 남아 있는 경우의 이야기다. 배우자와 자녀 모두가 포기하면 제1043조가 적용되지 않아 상속은 다시 다음 순위로 넘어간다고 결정문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배우자까지 포기하려면 사다리 끝까지 정리할 각오를 해야 한다.
3개월의 시계 - 기산점과 특별한정승인
민법 제1019조(승인, 포기의 기간) ① 상속인은 상속개시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내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다.
기간은 사망일이 아니라 상속이 개시된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이다. 이 안에 가정법원에 신고해야 하고, 신고 전에 상속재산을 조사할 수 있다(제1019조 제2항). 기간을 넘기면 단순승인한 것으로 본다(제1026조 제2호).
기간을 놓쳤다고 끝은 아니다.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그 기간 안에 알지 못하고 단순승인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다(제1019조 제3항). 특별한정승인이라 부르는 제도로, 뒤늦게 보증 채무가 드러난 경우의 구제 통로다. 미성년자인 상속인이 성년이 되기 전에 단순승인했다면 성년이 된 뒤 채무 초과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는 특례도 있다(제4항).
함정 - 재산에 손대는 순간 단순승인이 된다
민법 제1026조(법정단순승인)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상속인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 1.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를 한 때 2. 상속인이 제1019조제1항의 기간내에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하지 아니한 때 3. 상속인이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한 후에 상속재산을 은닉하거나 부정소비하거나 고의로 재산목록에 기입하지 아니한 때
가장 많이 걸리는 함정이 제1호다. 포기나 한정승인을 하기 전에 예금을 인출해 쓰거나 차를 팔거나 피상속인이 받을 돈을 대신 받으면 단순승인으로 간주되고, 그 뒤의 포기는 효력이 없다. 대법원은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채권을 추심하여 변제받은 것도 처분행위라고 보아 그 뒤에 한 상속포기의 효력을 부정했고(대법원 2010. 4. 29. 선고 2009다84936 판결), 가정법원에 포기 신고를 했더라도 이를 수리하는 심판이 고지되기 전에 상속재산을 처분했다면 단순승인으로 본다고 했다(대법원 2016. 12. 29. 선고 2013다73520 판결). 신고서를 냈다고 안심하면 안 되는 이유다.
반대로 지키고 관리하는 행위는 처분이 아니다. 대법원은 처분행위란 재산의 현상이나 성질을 변하게 하는 사실적 행위와 재산의 변동을 생기게 하는 법률적 행위를 말하고 상속재산의 보존과 관리행위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임차인과 같은 조건으로 임대차기간만 연장하는 계약을 맺은 것은 관리행위라고 보았다(대법원 2026. 5. 8. 선고 2025다220329 판결). 선은 분명하다. 재산을 바꾸거나 없애면 처분이고,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는 관리다. 한정승인 뒤에 재산을 숨기거나 써 없애거나 일부러 목록에서 빼는 것도 단순승인이 된다(제3호).
무엇을 고를 것인가 - 세 가지 기준
첫째, 재산이 전혀 없고 빚만 있으며 다음 순위 가족까지 함께 정리할 수 있다면 포기가 간명하다. 다만 사다리를 끝까지 내려가며 빠짐없이 신고해야 한다. 둘째,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다음 순위로 빚을 넘기고 싶지 않다면 한정승인이다. 집이나 차처럼 남기고 싶은 재산이 있을 때, 또는 부모나 형제에게 절차를 떠넘기고 싶지 않을 때 선택한다. 셋째, 실무에서 가장 흔한 해법은 한 사람이 한정승인을 하고 나머지 전원이 포기하는 조합이다. 빚의 이동을 한 사람 선에서 끊으면서 나머지 가족의 부담을 없애는 방법인데, 배우자가 한정승인을 맡고 자녀 전부가 포기하는 형태는 2020그42 결정으로 손자녀의 포기 없이 완결된다.
한정승인은 공짜가 아니다. 재산목록 작성과 채권자 공고, 청산 절차의 비용과 시간이 들고, 상속재산을 처분해 빚을 갚는 과정에서 세금 문제가 따로 검토되어야 한다. 그래도 빚이 재산보다 많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중에 재산이 드러났을 때 포기보다 유리한 것은 한정승인이다.
실무 순서 - 조회, 기산, 손대지 않기, 신고
순서는 넷이다. 사망 직후 피상속인의 재산과 채무를 먼저 조회한다. 상속 개시를 안 날을 기준으로 3개월을 세고 늦지 않게 가정법원에 신고한다. 그 사이 상속재산에 손대지 않는다. 예금 인출, 차량 처분, 채권 추심은 하지 않고 관리에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만 한다. 신고가 수리된 뒤에도 채권자의 소송이나 승계집행문 신청에는 포기 또는 한정승인 사실을 들어 대응해야 한다. 2020그42 결정 자체가 채권자가 손자녀들을 상대로 승계집행문을 받으려다 다투어진 사건이었다.
정리 - 포기는 넘기고, 한정승인은 끊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포기는 빚을 다음 순위로 넘기고, 한정승인은 내 선에서 끊는다. 자녀 전부가 포기하면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된다. 포기나 한정승인 전에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단순승인이 된다. 3개월은 상속 개시를 안 날부터 세고, 놓쳤다면 특별한정승인을 살핀다. 가장 흔한 해법은 한 사람 한정승인, 나머지 포기다.
빚만 남긴 상속에서 시간은 3개월뿐이고, 그 안에 손대지 말아야 할 것과 골라야 할 것이 정해져 있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 순서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상속 분쟁을 막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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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법률사무소 가양」에 2026. 9. 8. 게시한 글입니다.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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