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기가 코앞인데 임대인이 다음 임차인을 못 구했으니 기다리라고 한다. 앞선 글에서 그런 말에 임대인의 권한이 없다는 점을 짚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무엇을 할지보다 무엇을 먼저 할지가 중요하다. 순서를 잘못 잡으면 몇 달이 그냥 흐른다.
그리고 그 순서를 정하는 기준은 하나다. 내가 지금 그 집을 비울 수 있는 상황인가. 이 글은 그 기준을 축으로 임차권등기명령과 퇴거, 그리고 보증금반환소송이 각각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를 본다.
버티면 이자가 쌓일까 - 동시이행이 만드는 교착
가장 먼저 깨야 할 오해가 있다. 보증금을 받을 때까지 눌러앉아 있으면 그 사이 이자가 쌓여 임대인이 조급해지리라는 생각이다.
임대차가 끝나면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의무와 임차인의 목적물 인도의무는 동시이행관계에 놓인다(대법원 1977. 9. 28. 선고 77다1241, 1242 전원합의체 판결). 그래서 보증금을 받지 못한 임차인이 집을 비우지 않고 계속 사는 것은 불법점유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임차인에게 유리하다.
문제는 반대편이다. 임차인이 동시이행항변권을 쥔 채 점유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임대인도 이행지체에 빠지지 않는다. 이행지체가 아니면 지연손해금이 발생하지 않는다. 버티는 것은 그 집을 지켜 주지만 받을 돈을 늘려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임대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임차인이 나가지 않고 있으면 새 임차인을 들일 수도 없으니 어차피 돈이 안 들어오고, 그렇다고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오히려 임차인일 때가 많다.
임차권등기명령 - 집을 비우지 않고도 신청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검토할 것이 임차권등기명령이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3(임차권등기명령) ① 임대차가 끝난 후 보증금이 반환되지 아니한 경우 임차인은 임차주택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법원·지방법원지원 또는 시·군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조문을 보면 요건이 둘뿐이다. 임대차가 끝났을 것, 그리고 보증금이 반환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택을 인도했을 것은 요건이 아니다. 즉 아직 그 집에 살고 있어도 신청할 수 있다. 동시이행이 여기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효과는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임차인 쪽이다. 임차권등기를 마치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취득하고, 이미 가지고 있었다면 그대로 유지되며, 그 뒤에 이사를 나가고 전출신고를 해서 대항요건을 잃더라도 이미 취득한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은 사라지지 않는다(같은 조 제5항). 이 조항이 있어서 임차인이 비로소 그 집을 떠날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임대인 쪽이다. 등기부에 임차권등기가 올라가면 그 집은 사실상 새 임차인을 들이기 어려운 물건이 된다. 등기부를 본 사람은 보증금 분쟁이 진행 중임을 바로 알게 되고, 임차권등기가 끝난 뒤에 들어온 임차인은 최우선변제를 받을 권리도 없다(같은 조 제6항). 그래서 임대인이 이 단계에서 갑자기 돈을 마련해 오는 경우가 실무에서 드물지 않다. 소송보다 먼저 작동하는 압박이다.
2023년 개정으로 속도도 빨라졌다. 종전에는 임차권등기명령 결정이 임대인에게 송달된 뒤에야 등기가 되어서, 임대인이 송달을 피하면 등기가 늦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개정법은 결정을 임대인에게 송달하기 전에도 등기를 촉탁할 수 있도록 했다.
한 가지 더. 나중에 임차권등기를 지우는 문제에서도 임차인이 밀리지 않는다. 대법원은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의무가 임차인의 임차권등기 말소의무보다 먼저 이행되어야 할 의무라고 본다(대법원 2005. 6. 9. 선고 2005다4529 판결). 돈을 먼저 받고 등기를 지우는 순서라는 뜻이다.
퇴거 전에 소송을 걸면 - 판결문이 인도와 동시에로 나온다
소송은 집을 비우기 전에도 낼 수 있다. 다만 결과물의 모양이 달라진다.
임대인이 동시이행항변을 하면 판결 주문은 임차목적물을 인도받음과 동시에 보증금을 지급하라는 형태로 나온다. 앞서 본 동시이행관계가 그대로 판결에 반영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판결을 들고 집행하러 갈 때 생긴다.
민사집행법 제41조(집행개시의 요건) ① 반대의무의 이행과 동시에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집행권원의 집행은 채권자가 반대의무의 이행 또는 이행의 제공을 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여야만 개시할 수 있다.
임대인의 예금이나 다른 부동산을 압류하려면 내가 집을 비워 주었거나 비워 주겠다고 제공했음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판결을 받고도 한 단계가 더 남는다.
예외가 하나 있다. 임차주택 자체를 경매에 넘기는 경우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2 제1항은 임차인이 보증금반환청구소송의 확정판결에 따라 임차주택에 대해 경매를 신청할 때에는 민사집행법 제41조에도 불구하고 반대의무의 이행이나 이행의 제공을 집행개시요건으로 하지 않는다고 정한다. 그 집을 경매에 부칠 때는 이 부담이 없지만, 임대인의 다른 재산으로 갈 때는 그대로 남는다.
더 큰 문제는 이자다. 보증금반환소송의 실질적인 무기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연 12%의 지연손해금이다. 보증금은 액수가 크기 때문에 이 이자만으로도 임대인에게 상당한 압박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 동시이행 상태에서는 임대인이 이행지체에 빠지지 않으므로 이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이기고도 압박은 없는 판결이 되는 것이다.
퇴거와 이행제공이 지렛대가 된다 - 그리고 실제 판결
그래서 소송으로 나아가기로 했다면 순서가 바뀐다. 집을 비우고 인도를 이행제공해서 임대인의 동시이행항변권을 깨는 것이 먼저다. 그 시점부터 임대인은 이행지체에 빠지고 지연손해금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을 그대로 보여 주는 하급심 판결이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4. 19. 선고 2017가합542708 판결이다. 보증금 6억원의 임대차가 끝났는데 반환되지 않아 임차인이 소를 제기한 사건이다.
법원은 보증금에 대해서는 임차목적물을 인도받음과 동시에 반환하라고 명했다. 반면 임차인이 구한 대출이자 상당의 손해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유가 분명하다. 임차인이 그 아파트에 계속 거주하고 있어 인도의무의 이행제공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기 부족하므로 임대인의 동시이행항변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거주하면서 손해를 주장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이 판결이 그대로 보여 준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 순서는 임차권등기가 마쳐진 다음의 이야기다.
등기가 먼저다 - 순서를 바꾸면 권리를 잃는다
이 글에서 가장 사고가 나기 쉬운 대목이다. 임차권등기가 마쳐지기 전에 이사를 나가고 전출신고까지 해 버리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잃는다. 앞선 글에서 본 인도와 주민등록이라는 대항요건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임차권등기의 효력이 생긴 것을 확인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 순서만 지키면 권리를 지킨 채 나갈 수 있고, 순서를 바꾸면 권리를 잃은 채 나가게 된다. 같은 행동이 시점 하나로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실제로 퇴거할 수 있는지도 따져야 한다. 갈 곳이 있는지, 이사 비용과 이중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자와 손해를 실현하는 편이 나은 사건인지는 사안마다 다르다. 퇴거가 언제나 정답인 것은 아니다.
특별손해 - 미리 알렸는가가 전부를 가른다
집을 비우고 나면 비용이 발생한다. 임시로 머무는 숙소 비용, 짐을 맡긴 보관창고 비용, 다음 집 계약금을 날릴 위험 같은 것들이다.
이런 손해는 통상손해가 아니라 특별손해다. 민법 제393조 제2항은 특별한 사정으로 인한 손해는 채무자가 그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만 배상책임이 있다고 정한다. 결론은 단순하다. 미리 알리지 않으면 청구 자체가 출발하지 못한다.
앞의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은 이 부분도 보여 준다. 임차인이 다른 오피스텔 임대차계약의 계약금 5,000만원을 몰취당한 손해에 대해 법원은 특별손해에 해당한다고 보면서도 임대인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임차인이 다음 집 계약을 해둔 상태여서 만기에는 반드시 나가야 한다는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고, 임대인이 날짜를 맞출 테니 걱정 말라고 답한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손해라도 알린 사람과 알리지 않은 사람의 결과가 갈린다. 임시거처에 하루 얼마를 쓰고 있는지, 짐을 어디에 얼마를 주고 맡겼는지, 다음 집 계약금이 얼마이고 언제 몰취되는지를 그때그때 임대인에게 알려 두어야 한다. 물론 알렸다고 항상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알리지 않으면 다툴 기회조차 없다.
소송은 얼마나 걸리는가 - 소액사건심판법 준용
보증금반환소송에는 다른 민사사건에 없는 속도 규정이 붙어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13조(「소액사건심판법」의 준용) 임차인이 임대인에 대하여 제기하는 보증금반환청구소송에 관하여는 「소액사건심판법」 제6조, 제7조, 제10조 및 제11조의2를 준용한다.
핵심은 소가와 무관하게 준용된다는 점이다. 보증금이 수억원이어서 소액사건이 아니어도 이 규정들이 따라온다. 준용되는 제7조에 따라 법원은 바로 변론기일을 정할 수 있고 되도록 한 차례의 변론기일로 심리를 마치도록 해야 한다. 제11조의2에 따라 변론을 마친 뒤 즉시 선고할 수 있고 판결서에 이유를 적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변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액사건에서 쓰이는 이행권고결정은 준용 대상에 들어 있지 않다. 정확히는 변론을 하되 한 번에 끝내고 곧바로 선고하는 구조이고, 그래서 통상의 민사사건보다 빨리 끝나는 것이다.
이자에 관해서도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 제2항에 따라 임대인이 다투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에서는 연 12%가 적용되지 않는다.
정리 - 순서가 곧 전략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만기가 지났는데 보증금이 나오지 않으면 먼저 임차권등기명령을 검토한다. 집을 비우지 않고도 신청할 수 있고, 등기가 올라가는 것만으로 임대인에게 실질적인 압박이 되며, 무엇보다 그 뒤에 이사를 갈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준다.
그다음이 판단의 갈림길이다. 퇴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등기를 확인한 뒤 집을 비우고 인도를 이행제공한다. 그때부터 이행지체가 시작되어 지연손해금이 붙고, 발생하는 비용을 임대인에게 알려 두면 특별손해로 다툴 여지가 생긴다. 퇴거가 어렵다면 소송을 걸더라도 동시이행 판결에 그칠 가능성을 감안하고 전략을 짜야 한다.
따져야 할 것을 추리면 다섯 가지다. 계약이 실제로 종료되었는지 아니면 묵시적으로 갱신되었는지, 임차권등기가 마쳐졌는지, 임대인에게 집행할 만한 다른 재산이 있는지, 내가 실제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인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통지와 손해를 기록으로 남겨 두었는지다.
버티는 것도 나가는 것도 그 자체로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순서에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집주인이 중간에 바뀐 경우 보증금을 누가 돌려주는지, 임대인 지위 승계의 문제를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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