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 만기가 다가와 보증금을 달라고 하면 돌아오는 답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면 주겠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대인에게 그런 권한은 없다. 다음 임차인을 구하는 일은 전적으로 임대인의 사정이지 임차인이 기다려 주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이 글은 그 답이 왜 그토록 자연스럽게 나오는지부터 짚는다. 전세라는 제도의 실질이 무엇인지, 보증금이 어디로 가는지, 만기에 반환하지 못한 것이 어느 지점부터 민사상 채무불이행을 넘어 사기가 되는지까지다. 뉴스가 전세사기라고 부르는 사건들이 기획된 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세의 실질 - 집을 빌리는 계약이자 돈을 빌려주는 계약
전세를 임대차의 한 형태로만 보면 절반만 본 것이다. 실질은 자금의 대여에 가깝다. 임차인이 목돈을 임대인에게 맡기고, 그 돈에 대한 이자를 현금으로 받는 대신 주택의 사용가치로 갈음하는 구조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이자를 임료로 상계하며 목돈을 쓰는 것이고, 임차인 입장에서는 이자 없는 대여를 해 주고 그 집에 사는 것이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우리가 전세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등기부에 전세권이 설정된 물권적 전세가 아니라, 보증금을 지급하는 임대차다. 임차인이 가지는 것은 물권이 아니라 보증금반환채권이고,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으로 그 채권을 보강해 주는 구조다.
그래서 임차인은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담보 없이 개인에게 맡긴 채권자가 된다. 수억원을 빌려주면서 담보를 잡지 않는 거래는 상거래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세에서는 그것이 표준이다.
보증금은 보관되지 않는다 - 돌려막기가 기본 구조인 이유
임대인이 받은 보증금을 따로 예치해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기존 임차인에게 반환할 돈으로 곧장 나가거나, 애초에 그 집을 사는 자금의 일부로 들어가 있다. 새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이전 임차인에게 갚고, 다시 그다음 임차인에게 받는 순환이 반복된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무이자로 조달한 타인자본, 곧 부동산 투자의 레버리지다. 그리고 이 구조 자체가 위법한 것은 아니다. 보증금을 어떻게 쓰라고 정해 둔 법은 없고, 시장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순환이 끊기지 않으므로 아무 문제도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는 순환이 멈출 때 한꺼번에 드러난다. 같은 금액으로 다음 임차인을 구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임대인에게는 반환할 재원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그때 보이는 것뿐이다.
임대인은 채무자다 - 다음 임차인은 항변이 되지 않는다
집주인과 세들어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오해를 만든다. 그 이미지 안에서 임대인은 자기 재산을 빌려주는 시혜자처럼 보이지만, 법적으로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거액의 금전을 반환할 의무를 지는 채무자다.
임대차가 끝나면 반환의무의 이행기가 온다. 다만 이 의무는 임차인의 목적물 인도의무와 맞물려 있다. 대법원은 임대차 종료에 따른 임차인의 목적물 반환의무와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의무가 동시이행관계에 있다고 본다(대법원 1977. 9. 28. 선고 77다1241, 1242 전원합의체 판결).
이 구별이 중요하다. 임대인은 집을 비워 주면 보증금을 주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임차인이 구해지면 주겠다고 말할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앞의 것은 법이 인정한 항변이고, 뒤의 것은 임대인의 자금 사정일 뿐이다.
왜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가 - 그리고 언제 드러나는가
법은 임차인이 만기와 동시에 길바닥에 나앉지 않도록 완충장치를 두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4조(임대차기간 등) ② 임대차기간이 끝난 경우에도 임차인이 보증금을 반환받을 때까지는 임대차관계가 존속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임차인 역시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다음 집으로 이사할 수 없다. 결국 양쪽이 동시이행 상태를 유지한 채 그 집에 계속 사는 상황이 이어진다. 묵시적으로 갱신되거나 만기 후에도 임차권이 존속하는 형태로 시간이 흘러간다. 전세보증금 미반환이 사회 문제가 된 규모에 비해 실제 분쟁이 그만큼 터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은 표면화되지 않은 채 잠복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임차인이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터진다. 직장이 옮겨졌거나, 자녀 학교 문제가 있거나, 이미 다른 집의 계약금을 걸어 둔 경우다. 이때 임차인은 점유를 유지해서 얻는 사실상의 담보력과 이사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한다. 묵시적으로 갱신된 임대차라면 임차인이 언제든 해지를 통지할 수 있고 임대인이 통지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면 효력이 생기지만(주택임대차보호법 제6조의2), 그 3개월이 지나도 돈이 나오지 않으면 상황은 같다.
집을 비우면서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잃지 않도록 임차권등기명령이라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3). 다만 이 등기가 보증금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순위를 지켜 줄 뿐이고, 임대인에게 재산이 없으면 지켜진 순위도 숫자에 그친다.
사기죄의 기망 - 차용금 법리를 임대차에 대입하면
형법 제347조(사기) ①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돈을 빌린 뒤 갚지 못한 사건에서 사기죄가 언제 성립하는지에 관해 대법원의 기준은 분명하다. 차주가 차용 당시에는 변제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후에 변제하지 않더라도 이는 민사상 채무불이행에 불과하고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대법원 2016. 4. 28. 선고 2012도14516 판결). 판단의 기준 시점은 어디까지나 돈을 받은 그때다.
이 법리를 뒤집으면 그대로 요건이 된다. 받을 당시에 이행기에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하여 돈을 받았다면 기망이다.
전세에 대입해 보면 이렇게 된다. 만기에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없으면서 반환할 것처럼 계약을 맺고 보증금을 받아 다른 용도에 쓴 경우다. 여기서 능력이란 자기 자력으로 반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 임차인이 새로 낼 보증금이 있어야만 갚을 수 있는 상태는, 엄밀히 말하면 계약 시점에 자력이 없는 상태다.
그래서 전세사기라 부른다 - 기획형과 구조형
기획된 전세사기는 이미 형사법정의 단골이다. 자기 자본을 거의 들이지 않고 매매대금보다 높거나 비슷한 보증금을 받아 주택을 사들이는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 방식이 대표적이고, 이런 사건에서 사기죄 유죄가 확정된 예가 있다(대법원 2024. 3. 28. 선고 2023도18324 판결). 대법원은 원심에 사기죄의 고지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보아 상고를 기각했다.
주목할 것은 그다음이다. 평범한 아파트 임대차라고 해서 이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장이 괜찮을 때는 다음 임차인이 무리 없이 구해지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세가 조금만 밀려 같은 금액으로 다음 임차인을 구할 수 없게 되면, 상당수의 임대인은 새 보증금 없이 반환할 자력이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계약 당시에 이미 그런 상태였다면 그때 이미 요건은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다. 뉴스가 이것을 묶어 전세사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다만 균형을 잡아 두어야 한다. 판례가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계약 당시를 기준으로 한 반환 의사나 능력의 부재이고, 이를 증명하는 일은 실무에서 결코 쉽지 않다. 계약 이후 시세가 떨어져 결과적으로 반환하지 못한 것과, 처음부터 자력이 없으면서 받은 것은 법적으로 전혀 다르다. 앞의 것은 민사상 채무불이행이고 뒤의 것이 사기다. 이 경계에서 사건의 운명이 갈린다.
정리 - 사회가 너무 가볍게 다루는 금액
전세보증금은 개인이 개인에게 담보 없이 맡기는 돈치고 지나치게 크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제도의 위험성도, 보증금이라는 돈의 성격도 너무 가볍게 다루어 왔다. 임대인은 자신이 채무자라는 사실을 잊고, 임차인은 자신이 무담보 채권자라는 사실을 잊는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이라면 감정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들이 있다. 계약 당시 임대인의 자금 구조가 어떠했는지, 선순위 담보권과 다른 보증금을 합한 금액이 시세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했는지, 내가 낸 보증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반환이 지체된 경위와 그 무렵 임대인의 자산 상태가 어떠했는지다. 이 네 가지가 민사에 머무는 사건인지 형사가 열리는 사건인지를 가른다.
그리고 임대인 쪽에서도 새겨 둘 대목이 있다. 다음 임차인의 보증금이 있어야만 돌려줄 수 있는 상태로 계약을 이어 가는 것은, 시장이 받쳐 주는 동안에만 안전한 방식이다. 시장이 꺾이면 그 구조는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형사사건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보증금을 지키는 순서, 곧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이 언제 생기고 언제 깨지는지를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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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법률사무소 가양」에 2026. 8. 11. 게시한 글입니다.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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