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계좌로 받은 돈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언제 얼마를 이체했다"는 내역 하나를 증거로 그 돈을 빌려 간 것이니 갚으라는 소장이 날아온다. 차용증도 각서도 없는데, 상대는 이체내역이 대여의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실무에서 정말 자주 만나는 유형의 소송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계좌이체 내역은 돈이 오갔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고, 그 돈이 빌려준 돈이라는 점은 별도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이 소멸시효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다투느냐에 따라, 같은 이체내역을 두고도 결과가 크게 갈린다.
이 글은 이체내역 하나로 시작되는 대여금 청구 소송의 두 축인 소멸시효와 입증책임을 정리하고, 이런 사건의 상당수가 흘러가는 1심 소액사건의 현실, 그리고 피고가 되었을 때의 대응 순서까지 한자리에 모아 조망한다.
소멸시효 — 개인 간은 10년, 사업자 간은 5년이면 권리가 사라진다
대여금 채권도 채권이므로 소멸시효의 적용을 받는다. 원칙은 10년이다.
민법 제162조(채권, 재산권의 소멸시효) ①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그런데 사업자 사이의 대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행위로 인한 채권에는 5년의 상사시효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상법 제64조(상사시효) 상행위로 인한 채권은 본법에 다른 규정이 없는 때에는 5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그러나 다른 법령에 이보다 단기의 시효의 규정이 있는 때에는 그 규정에 의한다.
사업 자금이 오가는 사업자 사이에서 5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거래를 이어가며 언젠가 정산하겠지 하는 사이에 시효가 완성되어 버리는 사건을 실무에서 드물지 않게 본다. 빌려준 쪽이라면 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움직여야 하고, 소송을 당한 쪽이라면 이체일부터 소 제기일까지의 기간을 가장 먼저 세어 보아야 한다.
"그동안 계속 갚으라고 했다" — 말로 한 독촉만으로는 시효가 중단되지 않는다
시효가 문제되는 사건에서 빌려준 쪽이 가장 많이 하는 주장이 있다. 그동안 계속 갚으라고 요구해 왔으니 시효가 중단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인정하는 시효중단 사유는 정해져 있다.
민법 제168조(소멸시효의 중단사유) 소멸시효는 다음 각호의 사유로 인하여 중단된다. 1. 청구 2. 압류 또는 가압류, 가처분 3. 승인
말이나 문자로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은 법률상 최고에 해당할 뿐인데, 최고는 그 자체만으로 시효를 중단시키지 못한다.
민법 제174조(최고와 시효중단) 최고는 6월내에 재판상의 청구, 파산절차참가, 화해를 위한 소환, 임의출석, 압류 또는 가압류, 가처분을 하지 아니하면 시효중단의 효력이 없다.
즉 아무리 여러 해에 걸쳐 갚으라고 말해 왔어도, 그 독촉으로부터 6개월 안에 소 제기나 압류 같은 조치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시효는 그대로 흘러간다. 실제로도, 오랫동안 변제를 요구해 온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사정을 시효중단 사유로 연결해 입증하지 못해 손쓸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다.
반대 방향도 있다. 채무자가 원금 일부를 갚았거나 이자를 지급했다면 채무의 승인에 해당해 시효가 중단되고, 그때부터 시효기간이 다시 진행한다. 소송을 당한 입장이라면 마지막으로 돈이 오간 시점이 언제인지, 그것이 승인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이체내역만 있는 소송 — 대여 사실의 증명책임은 원고에게 있다
시효의 문턱을 넘었다면 본론은 입증이다. 개인 간이든 사업자 간이든, 소액 대여에서는 차용증 없이 이체내역만 남아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여기서 원칙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돈을 보낸 사실과 빌려준 사실은 다르다.
대법원도 같은 취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당사자 사이에 금전의 수수가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다툼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여하였다는 원고의 주장에 대하여 피고가 다투는 때에는 그 대여사실에 대하여 이를 주장하는 원고에게 증명책임이 있다." (대법원 2014. 7. 10. 선고 2014다26187 판결)
돈이 오가는 원인은 대여 말고도 많다. 증여일 수도 있고, 물품대금이나 용역대금일 수도 있으며, 동업 정산금일 수도, 받을 돈을 돌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이체내역은 돈이 건너갔다는 사실만 말할 뿐, 왜 건너갔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체내역 하나만 내밀며 대여라고 주장하는 소송은, 피고가 제대로 다투기 시작하면 원고에게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된다.
차용증 없는 재판의 실제 — 정황 싸움이 되고, 결과의 폭이 넓다
문제는 실제 재판이 원칙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직접증거가 없으니 양쪽 모두 이체 전후의 정황을 끌어모아 다투게 된다. 이체 직전의 대화, 두 사람의 관계와 거래 이력, 금액의 규모와 딱 떨어지는 정도, 이체 후의 언행, 일부 상환으로 볼 만한 돈의 흐름 같은 것들이다.
이 정황 싸움의 결과는 폭이 넓다. 원고가 수많은 정황을 쌓아 올려도 재판부가 원칙으로 돌아가 차용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청구를 기각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차용증 같은 직접증거 없이 정황의 연결만으로 대여가 인정되는 사건도 있다. 대여금 사건을 다수 대리해 오며 체감하는 것은, 같은 수준의 증거를 두고도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따라 결론이 갈릴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유형의 소송에서는 이체내역이 있으니 되겠지, 차용증이 없으니 안 되겠지 같은 단정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정황을 어느 쪽 이야기로 꿰어 내느냐의 싸움이고, 그 꿰는 작업의 밀도가 결과에 그대로 반영된다.
1심 소액사건의 구조 — 판단 근거를 알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런 사건의 상당수는 소액사건으로 진행된다. 소액사건심판규칙이 정한 기준에 따라, 제소 당시 소송목적의 값이 3,000만원을 초과하지 않는 금전 지급 청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액사건에는 신속한 처리를 위한 특례가 여럿 적용되는데, 당사자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이 판결이유 기재의 생략이다.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2 제3항 판결서에는 「민사소송법」 제208조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적지 아니할 수 있다.
같은 항은 쟁점이 복잡한 경우 등에는 이유를 적도록 노력할 것을 정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생략이 허용된다. 당사자로서는 왜 이겼는지, 왜 졌는지를 판결문만으로 알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여기에 몇 가지 현실이 겹친다. 소액사건은 일방 또는 쌍방이 대리인의 조력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소액재판부가 감당하는 사건 수도 많다. 그리고 사실심인 항소심이 한 번 더 남아 있다. 이런 구조가 겹치면서, 충분한 법리적 공방에 이르기 전에 심증 수준에서 결론이 내려진다고 느껴지는 사건도 있다는 것이 실무에서 받는 솔직한 인상이다. 법적 판단과 별개로 도의적으로는 돌려주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법정에서 들어 본 일도 있다.
이것을 재판의 잘못이라고만 할 일은 아니다. 제도가 신속한 처리에 무게를 두고 설계되어 있는 것이고, 그 구조 안에서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하나다. 심증에 맡기지 않도록, 기록으로 다투는 것이다.
소장을 받았다면 — 시효 항변부터 검토하고, 기록으로 다툰다
이체내역을 증거로 대여금 소송을 당했다면 순서대로 점검한다.
첫째, 소멸시효 항변을 가장 먼저 검토한다. 이체일부터 소 제기일까지 개인 간 10년, 상행위라면 5년이 지났는지, 중간에 일부 변제나 이자 지급처럼 승인으로 평가될 사정이 있었는지를 따진다. 시효 항변이 인정되면 대여 여부를 다툴 필요 자체가 없어진다.
둘째, 이체의 원인에 관한 정황자료를 시간순으로 정리한다. 문제된 이체만이 아니라 전후의 계좌 흐름 전체, 메신저와 문자 대화, 당시의 거래관계나 계약관계를 담은 자료를 시간 축 위에 올려 두면, 돈이 오간 맥락이 이야기로 드러난다. 재판부를 설득하는 것은 낱장의 증거가 아니라 이 맥락이다.
셋째, 소액사건이라고 방치하지 않는다. 액수가 작다고 답변서를 내지 않거나 불출석하면 1심은 그대로 흘러가고, 1심에서 형성된 사실관계는 항소심의 출발점이 되어 그대로 부담으로 이어진다. 다툴 사건이라면 1심부터 다투어야 한다.
덧붙이면, 수년 전에 정당한 이유로 지급받은 돈인데도 이제 와서 항변할 증거가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계산으로 일단 대여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거는 경우가 실무에서 종종 있다. 이런 유형의 사건을 여러 건 대리해 오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났어도 기록은 생각보다 많이 복원된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일이라고 지레 포기할 이유가 없다.
정리 — 돈이 오간 "이유"의 증거를 남기는 것이 최선의 예방이다
결국 이 모든 분쟁의 씨앗은 하나로 모인다. 돈은 오갔는데, 그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
빌려주는 돈이라면 차용증이 원칙이다. 격식을 갖춘 문서가 아니어도 좋다. 메신저로 금액과 변제기, 이자를 확인해 두는 것만으로도 분쟁에서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진다. 빌려준 것이 아니라면 그 나름의 근거를 남겨야 한다. 증여라면 증여의 정황을, 대금이라면 거래의 근거를, 정산이라면 정산의 내역을 남겨 두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큰돈이 아니라서 기록을 미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분쟁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이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왜 보내는 돈인지 한 줄을 남겨 두는 습관이, 몇 년 뒤의 소송 하나를 없앤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법률사무소 가양」에 2026. 7. 25. 게시한 글입니다.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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