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원에서 지급명령 정본이 날아든다. 청구 금액은 약 2억 원. 계약서 한 장 쓴 기억이 없는데, 사업자등록증에 올라 있던 내 이름이 나를 채무자로 만들어 놓았다.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남겨진 가족이 고인의 사업에서 비롯된 소송까지 떠안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번 사례는 그렇게 '서류상 대표'라는 이유만으로 약 2억 원의 투자금과 대여금을 청구당한 의뢰인이, 청구 전부 기각 판결을 받아낸 사건입니다. 이름 석 자를 빌려준 대가로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사건의 배경
의뢰인의 남편은 명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개인사업체를 운영했습니다. 다만 사업자등록 명의는 세금 문제 등을 이유로 의뢰인 앞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사업을 해 온 남편이 알아서 처리하려니 생각하고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 사업은 전적으로 남편이 꾸려 갔고 의뢰인은 주말에 이틀 정도 매장 판매를 도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생전에 남편과 거래하던 한 부부가 의뢰인을 상대로 지급명령을 신청해 왔습니다. 남편에게 투자한 1억 5,000만 원과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했다는 4,760만 원, 합계 약 2억 원을 의뢰인이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의뢰인이 사업자등록증상 대표라는 것, 그리고 돈이 의뢰인 명의의 계좌로 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상 대표'라는 이름이 의뢰인을 피고로 만들다
기록만 놓고 보면 출발은 분명 불리했습니다. 사업자등록증의 대표자도, 투자금과 대여금이 입금된 계좌의 명의자도 의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의뢰인이 남편과 함께 사업체를 실질적으로 운영한 공동대표라고 주장했고, 그것이 안 되면 명의를 빌려준 사람으로서 상법 제24조의 명의대여자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의뢰인은 물론 그 자녀와 부모의 계좌 내역까지 조회하겠다며 증거신청을 이어 갔습니다.
이름을 빌려준 것은 사실이니 포기해야 하는 사건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명의와 책임은 다른 문제라는 데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해결방법 - 상속포기, 계약당사자 확정, 그리고 상법 제24조
저는 사건을 세 갈래로 설계했습니다.
먼저 상속포기였습니다. 남편의 채무가 상속을 통해 가족에게 넘어오는 길부터 끊어야 했기에, 의뢰인과 자녀들의 상속포기 심판을 청구해 수리·확정받았습니다. 이로써 망인의 채무가 상속을 통해 가족에게 이어질 길이 막혔습니다.
다음으로 계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였습니다. 계약의 당사자는 명의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의사로 정해집니다. 투자계약과 금전소비대차계약 모두 남편이 자신의 이름으로 체결한 것임을 입증하면, 의뢰인은 애초에 그 계약과 무관한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상법 제24조의 요건이었습니다. 명의대여자 책임은 상대방이 명의자를 영업주로 오인하고 거래한 경우에만 성립하고, 명의대여 사실을 알았거나 모른 데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처음부터 남편을 대표로 알고 거래했다는 사실을 쌓아 올리면, 명의대여자 책임도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원고들이 내놓지 않은 약정서 한 장을 찾아내다
이 사건의 승부처는 상대방이 제출하지 않은 서류에 있었습니다. 1억 5,000만 원이 오간 투자계약에는 해지 통보 방법까지 정해져 있었는데, 정작 그 내용을 담은 처분문서인 약정서가 증거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준비서면에서 이 공백을 먼저 지적했습니다. 약정서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약정서의 당사자 명의가 의뢰인이 아니라 남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의뢰인과 함께, 이미 정리해 두었던 남편의 유품을 다시 헤쳐 그 약정서를 찾아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약정서는 상대방이 스스로 보낸 서류 속에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계약을 끝내겠다며 남편 앞으로 보낸 내용증명에 문제의 약정서가 첨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약정서의 당사자란에는 남편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남편이 대표이사로 새겨 쓰던 명함, 남편이 대표로서 체결한 위탁판매계약서, 상대방이 남편을 '대표님'이라 부르며 나눈 대화, 계약 종료 통보조차 남편에게 했던 사실까지 하나하나 증거로 보탰습니다. 상대방이 처음부터 남편을 영업주로 알고 거래했다는 점이 여러 방향에서 드러났습니다. 아울러 가족들의 계좌까지 들여다보려는 증거신청에 대해서는, 설령 그 사실이 입증되더라도 청구의 결론과 무관하다는 점을 짚어 방어했습니다.
법원의 판단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투자계약도 금전소비대차계약도 의뢰인이 아닌 망인과 체결된 것이고, 원고들은 사업자등록증상 명의와 관계없이 망인을 대표로 인식하고 거래했으므로 명의대여자 책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설령 오인의 여지가 있더라도 원고들에게는 중대한 과실이 있다는 판단까지 더해졌습니다. 소송비용도 전부 원고들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기록상 대표라는 불리한 출발이었지만, 계약당사자 확정의 법리와 상법 제24조의 요건을 파고들어 얻어 낸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자등록증에 남아 있던 이름 석 자의 무게도, 이 판결로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계시다면
가족이나 지인에게 사업자 명의를 빌려주었다가, 어느 날 그 사업의 빚을 갚으라는 청구를 받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의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책임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상대방이 누구를 영업주로 알고 거래했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고, 상속 문제가 얽혀 있다면 상속포기 등 절차를 제때 밟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슷한 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다면,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아래로 편하게 상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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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법률사무소 가양」에 2026. 7. 3. 게시한 글입니다.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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